비자금 숨겨둔 것 구권 화폐 미끼 사기 여전
31 4483 2007-01-05
구권 화폐를 미끼로 하는 사기극이 끊이질 않고 있다.

청와대 등 고위층을 사칭하거나 이들과 친분을 내세워 20∼30년 전 발행된 1만원짜리 지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면 20∼30%를 수수료로 주겠다는 식이다. 매번 똑같은 수법에 피해자들이 당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구권 화폐란 옛날 돈, 그 중에서도 1994년 1월 이전에 발행된 1만원짜리 지폐를 일컫는다. 신권에는 있는 위조방지용 은색 실선과 숨은 그림이 새겨져 있지 않다. 크기와 무늬가 신권과 조금 다르지만 시중에서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한국은행은 구권을 거둬들여 계속 폐기 중이다.

구권 화폐 사기 수법은 단순하다. 사기범들은 “과거 정권 때 전직 대통령 등이 보관해 둔 비자금을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기 직전 1만원짜리 현찰로 바꿔 놓았다"는 ‘레퍼토리’를 그대로 쓴다. 일련번호로 된 거액이다 보니 수사기관에 추적될 수 있어 신권으로 바꿔야 한다고 그럴싸하게 피해자들을 속이는 것이다. 96년 총선과 97년 대선을 앞두고 명동, 강남 등 사채시장에 나돌았던 그 얘기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가 최근 적발한 사건도 유사하다. 검찰 조사 결과 김모 변호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피해자를 속여 32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밀리에 보관 중인 비자금 65억원을 50억원으로 바꿔주기로 했으니 6억원을 주면 7억원으로 돌려주겠다"면서 돈을 받아 가로챈 사채업자 이모씨가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 같은 구권 화폐 사기 사건은 2000년 사채업자 장영자씨가 구권 화폐 교환을 미끼로 200여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형사처벌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10여차례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구권 화폐 사기 사건이 뒤를 잇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와대 등 고위층만 들먹이면 쉽게 믿어버리는 사회 풍조 속에 과거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권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통치자금의 존재를 믿어 이런 사건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사기꾼들은 청와대 고위층을 사칭하거나 이들과 친분을 내세운다. 또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구권이 보관된 창고를 직접 본 것처럼 실감나게 묘사하거나 구권 화폐 몇 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검찰은 사기꾼들이 거론하는 거액의 구권 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장영자씨 사건 때 철저히 수사한 끝에 구권 화폐의 실체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서울중앙지검 한무근 형사5부장은 “구권 화폐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기에 걸려든 피해자도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볼 수 없다"면서 “실체 없는 구권 화폐를 통해 한몫 벌어 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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